두놈들 이야기/2011년

해든 이발하다..

건전육성 2011. 2. 9. 08:24


해찬때도 그랬다.
남들은 아이가 울어도 억지로 잡고 머리를 자른다고 하지만, 우리는 울면 그냥 데리고 온다.

머리 자르는 거 그거 뭐라고...
그보다 중요한 건 아이가 받는 공포 스트레스이다.

아이는 무서워하는데 엄마는 그 마음을 전혀 모르고 억지로 자르게 한다면, 
물론 요즘 엄마들은 그정도는 아니겠지만...

아이가 무서워하는데, 별것 아니라고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울면서 머리를 자르게 한다면,
나는 반대다.

머리 자르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가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는 가가 더 중요하다.

만약, 아이가 우는데도 억지로 머리를 자르게 한다면...
물론 얼마지나지 않아 아이는 별거 아니라고 받아들이겠지만,
그 공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의사가 아닌 남에 의해 강제로 행하여졌기에, 
기억에는 없을 지 몰라도 자기에 의사가 묵살되었다는 상처와 함께 영원히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잠재의식은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하는 행동의 기본 패턴이 될 것이다.
어쩌면 수동적인 아이로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 받아 들이고 이겨낼 때 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준다면,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했을때..
그와 함께 엄청난  칭찬이 갔을 때..

아이는 스스로 공포를 극복했다는 성취감과 함께 부모로부터의 칭찬으로 인해 
자기 결정과 용기있는 행동에 더 없는 자신감을 얻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로 부터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존중감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마음과 자신에 대한 긍정적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게 되면, 그 아이는 굳이 노력하지 않더라도 바른 아이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요는 여기에 있다.
머리 자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처음 유치원 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유아예배 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해든은 또래와 달리 아직 우리와 예배를 같이 드리고 있다.
유아실에 가면 문앞에서부터 고개를 흔들기 시작한다.
왜 인지에 대해서는 시간을 내어 고민을 해 보아야 겠다.

글을 써다보니 문득 옛날 생각이 떠 오른다. 
해찬 어릴때 분리불안을 잘 극복해 보겠다고, 엄마가 안고 화장실 다니고 했던 생각..
그것을 몇번하고 나니 엄마가 다시 온다는 것을 알게되고 자연스럽게 혼자서 엄마를 기다릴 줄 알게되고, 

해찬도 그랬었고, 해든도 마찬가지이다.
해찬은 유아예배를 내가 근 6개월 정도를 같이 드렸던 것 같다.
당시 해든은 어려서 엄마가 자모실에서 따로 예배를 드려야 했기에, 

머리를 자르기위해 해든에게 몇번이나 물어봤는지 모른다.

어느날 문득, 해든에게 머리자르러 가자고 했더니, 
선뜻 가자고 했다고 한다. 그날이 오늘이다.

해든을 어린이집 보내자고 했을 때, 내가 가장 염려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좀 더 데리고 있었으면 했지만, 엄마가 힘들어 하는 모습이 눈으로 보이기에
내 주장만을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해든은 아주 잘 적응해 주었고, 지금은 어린이집 가는 것을 아주 신나한다.